밀양을 수없이 지나가면서도 정작 표충사는 들러보질 못하였는데 이번에 표충사로 목적지를 정하여 출발하였다.
표충사를 들어오니 우선 커다란 이팝나무가 흰꽃을 피우고 화사하게 눈을 자극한다.
넓은 공간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어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절이다.
그 가운데 보물 467호인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7.7m의 3층 석탑이다. 1995년의 해체 보수때에 나온 많은 유물은 탑과 표충사의 역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탑은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고, 지붕돌의 주름도 한개가 줄어든 네개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여러 장식과 함께, 아직도 철주가 높이 솟아 있고, 지붕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지붕돌에는 근년의 것이긴 하지만 2개의 풍탁이 달려 있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보이는 특징으로 보아 통일 신라의 늦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균형있는 전체적 비례와 우아한 모습은 같은 시기의 석탑 중에서도 뒤어나다. [설명문 전문]
대광전의 삼불상은 햇살에 환하게 보이고 후불탱화는 어느 사찰의 것보단 단순하여 오히려 깨끗하게 보였다.
대광전의 단청은 더욱 붉은 빛을 발하여 내부에 평온한 느낌을 강렬한 느낌으로 바꿔주기에 충분하였다.
전국 각지에 있는 사명대사의 초상화를 전시하여 놓았다.
느지막하게 도착하여 거리가 짧은 금강폭포를 가려고 산길을 오르려니 효봉대종사 사리탑이 들어욌다.
자연석에 만든 사리탑이 웅장하긴 하였지만 무소유를 주장하며 하나도 남기지 않으신 법정스님과 비교가 되었다.
흥룡폭포,층층폭포, 고사리 분교를 거쳐 사자평이 이르는 젊은 시절 등산로를 가지 못한 아쉬움이 계곡의 바위와 께끗한 물소리에 저절로 씻어진다.
드디어 금강폭포에 도착하였다. 비단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이 보여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공감이 절로 갔다.
이제 해도 뉘엿뉘엿하여 표충사를 떠난다.
아쉬움보다는 행복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표충사였다.
아래는 입구의 표충사 안내도에 기록된 내용이다.
표충사 (表忠寺) 국보 75호, 보물 467호, 지방문화재 제14호, 52호
지금으로부터 약 1329여년전 (서기 654년)신라 진덕여왕 8년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시어 사찰 이름을 죽림사라 하였다.
그 후 서기 826년 인도스님 황면선사께서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지니시고 동방으로 수려한 강산을
착으시던 중 이곳 천황산 신록의 오색 서운을 보시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당시 신라 흥덕왕 셋째 왕자께서 나병으로 고생하시며 영산약수를 두루 찾아서 다니시다가 이곳 재약산 죽림사에 거유하시게 되었다.
이 때에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영정약수를 복음하시어 왕자께서 곧 병이 완쾌되었다. 이때에 또한 고려 충렬왕 12년 삼국유사 저자이신
일연국사께서 천여명의 대중재기하여 불법을 중흥하시니 국왕으로부터 동방 제일사찰로 승격되었으며, 이조시대 임진왜란 당시 항마구국 구민의 위훈대공을 세워 천추만데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기신 서산, 사명, 기허 삼대 성사님의 충령을 표위하고자 현종 임금께서 (기유년) 표충사라는 휘호를 하사하시므로 표충사라 하였다.
표충사에는 국보 75호인 청동함은향완 (靑銅含銀香玩)이 보존되었으며, 이 향완은 아름다운 선과 섬세한 문양 조각미에 은입사로 다듬어진 동양에서 오직 하나뿐인 국보이다.
또한 보물 재 467호 삼층 석가여래 진신사리탑과 민속자료 제 29호 사명대사님의 친수 가사삼장 연화바루를 비롯하여 사명대사 님의 유품 300여점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지방문화재 14호 표충사 석등, 지방문화재 제52호 표충서원 대광전 외 법당건물이 25동이 현존하고 있는 대가람이다.
'여행 이야기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주 벽초지수목원 (0) | 2015.06.01 |
---|---|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0) | 2015.05.25 |
산청 물산마을 선도대 (0) | 2015.05.11 |
삼가 기양루 (0) | 2015.05.11 |
산청에서 오르는 황매산 (0) | 2015.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