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동화사는 봉우리마다 부처님의 미소와 법음이 가득하고, 옛 신라의 화랑정신과 통일의 정기가 어린 민족의 영산인 팔공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 창건당시에는 유가사로 불리었지만, 832년 (신라 흥덕왕 7년) 심지왕사가 사찰을 크게 중창할 때 겨울인데도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서 동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중창당시 동화사는 금산사, 법주사와 더불어 진표계 법상종의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으며, 고려말 홍진국사와 자정국사가 상주하면서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대사가 동화사에 영남승군의 사령부를 설치하고, 승군의 대장인 영남도총섭이 되어 팔공산성을 쌓고 승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 대구광역시와 경북의 청도, 고령, 성주, 칠공군 내의 사찰을 관할하고 있다.
부속암자로는 비로암, 부도암, 내원암, 양진암, 염불암, 약수암 등이 있으며, 지정문화재로는 동화사 대웅전 (보물 제1563호)을 비롯하여 경내에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 동화사 아미타회상도(보물 제1610호), 목조 약사여래좌상 목장전적(보물 제 1607호)등 11점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극락전 (제11호)등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한편, 1992년에는 높이 약 33m 통일약사대불을 준공하여 국민안녕과 민족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갓바위를 거쳐 다음 코스는 동화사가 선택되었다.
네비를 따라 들어선 동화사의 일주문이 너무나 거대하여 기를 확 죽이는거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땡볕을 원망하며 그늘을 고마움을 잠시 느낄사이도 없이 절입구에 도달하였다.
사천왕상은 조금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위엄보다는 친근감이 감돈다.
대웅전 입구에 전각이 우람함을 뽐배고 있고 그 아래의 통로에는 연등이 진열되어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대웅전은 오히려 아담하게 느껴지고 화려한 채색으로 인하여 잘차려입은 새색시 같이 느껴졌다.
종루는 원음각으로 명명하여 따로 조성되어 있다.
통일범종루가 따로 있는 것과 같이 이곳 팔공산 동화사는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이 유난히도 많은 곳이었다.
계곡길을 따라 내려가 통일약사대불을 향하였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영광이 있었다.
구도로의 일주문이 있고....
바로 밑에 마애불 좌상을 감상하였다. 그리곤 구길을 따라 서로 두손을 꼭잡고 계곡길을 올랐다.
동화사 입구 마애불 좌상
보물 제243호
암벽에 돋을 새김한 불상을 마애불이라 한다. 이 마애불 좌상의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배꼽 앞에 놓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옷은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이다. 머리와 몸뒤의 광배는 두줄의 선으로 표현하였고, 그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표현이 정교하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꽃대좌가 구름위에 떠있어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름무늬의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상이 더욱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이 불상은 체구에 비해 얼굴이 풍만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좌와 공배,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통견 : 부처가 가사를 입는 형식의 한가지. 가사가 양어깨를 모두 가린채 걸쳐진 형태를 말한다.
광배 : 종교화에서 성신 성자의 뒷면에 광명을 표현한 것으로 머리 뒤의 원형 것을 두광, 등뒤의 타원형의 것을 신광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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