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국내)

동해안 일주 (등명낙가사와 잠수정 침투지역)

OneMoreTime 2014. 8. 22. 13:04

정동진을 끼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등명낙가사가 나온다.

강원도 태백산맥의 동쪽 정동에 위치한 등명낙가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처음은 수다사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에 병란을 막고자 수중보궁을 모셨다고 한다. 고려초기 등명사로 바뀌었고 수많은 스님들이 참선수도 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곡(1392년)이 등명사에서 해돋이 광경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려시인 김극기 (1180년대)는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있고, 층대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있다.

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 핀 꽃은 고운 빛을 머금어,

봄을 아름답게 하여 봉우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올라오는 북소리는 골짜기에 불어내는 바람을 전한다"라 하였다.

등명사는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의 위치하였다하며 풍수지리로 볼 때, 강릉 보호부내에서 암실의 등화 (暗室燈火)와 같으며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학도가 3경에 괘방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전해진다.

다른 한설은 분수보현보살이 부처님 진신사라를 모시고 동해로 내려와서 오대산에 모시고 보현보살은 보현사에 한송사는 문수보살, 이 곳 수다사는 오백나한이 머물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은 불고를 말살하고 유교정책을 펴고자 할 때 제일먼저 정동에 日, 月의 정기를 등명사가 받는 것을 알고, 온갖 누명을 씌워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겨 점술가에 물었는데 동해 용왕이 노했다 하여, 신하를 보내 내를타고 이곳에 오니 수많은 쌀뜬물이 바다로 흘러 용왕이 노하셨다"하여 등명사를 폐사시키니 그후 500여년 동안 정동에 등불이 꺼지고 옛 고려 오층탑만이 등명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후 1950년대 경덕 영해당선사께서 10여채의 민가를 옮기고 옛 극락전을 짓고, 관세음보살이 상주하신 보타낙가산을 따 등명낙가사로 개명하고 해강 유근형 옹의 3년 6개월의 각고 끝에 청자 오백나한을 조성해 모시고 500명의 회원이 남복평화통일을 염원하였다. 그후 기도도량으로 중창원을 세우시다가 영산전을 시작하시던 중 1981년(음)11월11일 열반하시였다. 현 주지 청우스님의 원력으로 16만평 임야를 매입해 조계종에 등록하고, 영산전 50평, 삼성각 범종각, 극락전, 약사전, 안심당, 400평 요사채, 일주문, 문수당, 조실당, 전등선원 등을 새로이 창건하셨다, 팦으로 오백나한전, 삼층사리탑, 오층사리탑, 사적비를 세우고 동방만월 약사여래대불과 수중적멸보궁을 모실 계획이다.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정토삼매경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난 곳에 극락국토가 있다고 한다. 극락이란 명칭은 즐거움이 있는곳 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안양(安養)으로 번역된다. 아미타불은 성불 저네는 한 나라의 임금의 비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48가지 원력을 세워 아미타불이 되셨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벅천억 불국토를 비치고, 수명이 한량없어 백천억겁으로도 셀수 없다고 하며 극락전을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극락전에는 가운데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거 좌우에는 고해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자리잡고 있다. (낙가사 극락전) 삼존불 뒤에는 극락의 법회 장면인 극락회상도나 극락구품탱화 등이 모셔져 있다.

1995년 4월 19일 (음) 3월 20일 청우스님께서 낙성식을 봉행하셨다. 

 

영산전이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하고 계신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와 나한님을 모시기 위한 법당이다.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로 제화가라보살 (연등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에는 문수,보현,관음,대세지보살과 일광,월광보살, 십대제자, 사천왕 등을 모셨다. 나한은 응공(마땋이 공경 받으실 분)이라고도 하며 금생에서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난 분이다. 경전에는 부처님과 동등한 신통력을 갖춘 분이라고 하며 부처님 당시의 제자모습이기에 근엄하지도 않으며 이웃같이 친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불단 좌우에 모셔진 오백나한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고 북한을 같이 고향으로 두신 고경덕, 손경산 두 스님께서 오백나한의 힘으로 남북 평화 통일을 이루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인간문화재 해강 유근형 옹의 3년6개월의 가고 끝에 1977년 10월 오백나한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한분 한분이 옛부터 전승되어 오던 나한도에 근거하여, 고려청자 비법 그대로 조성하였기에 그 독특함을 한층 더해준다. 또한 이 나한상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부요직 인사들이 동참해서 간젛란 남북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았다. 삼존불 뒤로는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입상을 모셨거, 죄측으로 104워 화엄신중님과 지장보살 탱화를 모시고 우측으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과 감로탱화를 모셨다.

1982년 (음) 5월 5일 영산전 낙성식을 청우스님께서 봉행하셨다.

"아름다운 금오산이 옥봉을 이고 힘차게 솟은 푸른파고 공중에서 부서진다.

학처럼 파리한 스님은 품격을 자랑하고 뛰어난 경치를 땅도 공교로움을 뽑낸다.

닭도 울지 않는 새벽에도 루에는 해가 뜨고 신기루 이는 곳에 해풍이 산들산들 탑대는 기이한 정취를 서로 알것 같아 아침해를 기다리려니 만물의 붉음이 드러나네" (1270년 등명사에서 이승휴 지음)

"망망한 물결을 절이 누르고 앉았어니 오르매 마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듯,

 발 걷어니 대 그림자는 성긴듯 백백 베게를 의지하니

 여울소리는 높으락 낮으락 고요한 밤 경루에 향 촛불이 싸늘하고 달 밝어니 객실에는 갈건이 써늘해라

이런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이 없어서 온종일 먹고 살기에 바쁘다니" (1160년 등명사에서 김돈시 지음)

만월보전

만월보전, 약사전은 약사유리광여래의 불상을 모신 법당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광 세계의 교주로써 대의왕불이다. 약사여래는 과거에 12대원을 세워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지난을 소멸시키며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또 부처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묘과를 증득케 하겠다고 서원하였다. 약사여래불상의 형상은 큰 연화 위에 왼손은 약병을 오른손은 시무외인(두려움을 없애는 인)을 짓고 있다. 좌우에는 일광 변조보살과 월광 변조보살이 협시해 있다.

불상 뒤에는 약사회상도를 모셨는데 불설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하면 일광, 월광보살과 12신장이 호법신장으로 되어 있다. 간혹 사천왕을 12신장과 같이 모시는 경우가 있다. 옛부터 정동쪽은 약사여래도량으로 동방만월 약사유리광 여래보전이라고 한다. 약사전 뒤 푸른 대나무 숲속에는 천년전 옛 등명사 보궁법당 터만이 고려오층석탑을 앞에 두고 오늘도 묵묵히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낙가사를 나와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북한 잠수정의 침투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곳이다.

지금은 군사박물관이 설치되어 함정이 하나 서있고 도로옆 기찻길은 무심한 새월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