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국내)

동해안 일주 (삼척 죽서루)

OneMoreTime 2014. 8. 22. 11:44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접하지 않은 삼척 죽서루

이 누각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가 쓴 죽서루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는 이미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403년 (태종 3년) 당시 삼척부사 김효손이 고쳐 지었다.

절벽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어 있고, 누 아래의 17개 기둥 중 9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8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진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은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동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좌측 툇간(건물의 덧달아 난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누각에 걸린 글씨 중 '제일계정(第一溪停)'은 1662년 (현종 3년)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1711년(숙종 37년)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1837년 (현종 3년)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정조, 율곡 이이 선생 등 많은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오십천 너머에는 삼척 세계 동굴 엑스포장이 자리를 하고 있다.

 

 

 

용문바위

신라 제30대 문부왕이 사후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이다. 그 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었다.

 

서루 선사 암각화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 기호, 성혈 등을 그리거나 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 생식기 보양의 구멍을 둟어 놓은 성혈 암각이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성형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다음 원형의 돌 또는 나무로 연마, 구멍을 넓혀서 만든다. 죽서루 경내의 성혈은 죽서루 동쪽 용문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3cm 크기이며 모두 10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