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국내)

오천항의 충청 수영성

OneMoreTime 2016. 6. 1. 14:32

갈매못 성지를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오천항에 붙어있는 충청 수영성이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수영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는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하였으며, 조운선의 보호와 안내 그리고 외적 방어의 역할을 하다가 1896년 폐영되었다.

충청 수영성은 1510년 수사 이장생이 돌로 쌓은 성이며, 현재는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서문을 비롯하여 1,650m가 남아 있다.

북벽과 남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서벽은 바다와 면한 지점에 쌓았으며, 서벽 앞은 U자 모양의 포구를 이루어 전형적인 조선시대 수군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내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영보정은 천하명승으로 알려져 조선시대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방문하여 많은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충청수군은 임진왜란 때는 남해바다에서 통제사 이순신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칠천량 해전 (1597)에서는 수사 최호가 통제사 원균과 연합하여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병자호란 (1636)때는 수사 강진흔이 강화도 갑곶에서 청군을 방어하는 등 국가 위기 시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다른 수영성 유적은 훼손되어 원래의 경관을 잃어 버렸지만 이곳충청 수영성은 지형과 함께 경관이 잘 보존되고 있다.



진휼청 (賑恤廳)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엔ㄴ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객사와 삼문만이 남아 있다.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민빈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뭉이며, 대청, 온돌방, 툇마루, 부엌 등이 있다. 춫청수영 고지도 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휼청에서 바라본 오천항의 호우는 한가로움 속에 여유가 넘처나는 듯하다.


영보정 (永保停)

영보전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짖고 계속 손질하여 고쳐 온 우리나라 최고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확학루, 한산사와 얼=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가 전해온다.





바닷가 성곽을 따라 걸으니 길 건너편에 삼문과 객사가 눈에 들어온다.


내삼문 (內三門)

조선시대 충청수영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1896년 폐영과 함께 대부분 소실되고 객사, 진휼청, 공해관의 삼문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수사의 집무실이었던 공해관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삼문이다. 원래는 삼문뒤의 객사와는 별도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객사와 함께 오천초등학교 자리에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판은 김가진이 썼다.



소성마을의 역사

이 마을은 수심이 깊은 천수만 연안에 위치한 천연적인 요새지로 백제때는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신라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군선을 두어 지키다가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충청수영은 태조 5년(1396)에 고만 (현 주교면 송학리)에 수군 겸 절제사영을 설치하였다가 그 후 이곳 회이포에 옮겨 졌으며 세종 3년(1421)에는 도안무처차사 다시 세조 12년(1466)에는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고 1509년에는 성을 축조하였다. 성은 길이 실ㅊㄱ치 1650m 높이 11척 우물이 넷 못이 하나 옹성은 다섯 그리고 성문이 다섯이었다.

충청수영의 관할 구역은 금강하구에서부터 평택에 으르는 해안으로 이곳에 본영을 두고 군선 142척 수군 6416명으로 연안경비와 조운선 보호관리를 담당하였다. 본영에는 군선 40척 선군 1766명 선직 114명이 있었으며 최고 사령관은 수군절도사 부사령관은 우후(虞侯 正四品)였다. 성내에 있던 건물은 동헌 5간 아사15간 영보정 24간 등 33동 312간에 달하였다. 500여년간 서해안 방어의 중심지 였던 충청수영은 1896년 탁지무훈령으로 폐영되어 모든 장비는 군부로 이속되고 재물은 탁지부에 이관되었다. 1901년 3월 6일에는 군부훈령에 의하여 수영건물을 불태워 장교청 등 11개 건물만이 남게되었다고 한다. 1901년 4월 18일에는 보령군, 홍주군, 결성군, 서산군 일부와 서해도서를 합하여 오천군을 신설하고 천동면 천동리 (현 오천면 소성리) 구 장교청에 사무실을 정하였다. 1914년 부군폐합령에 의하여 오천군을 폐지하고 천동면 지역과 도서지역을 합하여 오천면으로 하였고 면소재지는 소성리로 하였다. 현재는 성지와 서문 진휼청이 남아있고 장교청과 삼문하나가 자리를 옮겨 보존되어 있어 옛역사의 애환을 말해주고 있으며, 지금의 소성리는 일제 말기에 7830평의 매립공사를 시작 해방후에 완공을 보아 취락을 조성하고 어항으로 개발되어 서해안시대를 맞아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예부터 오천에는 아름다운 경치로 고소십경(姑蘇十景)이 전한다.

1. 안면운송 (安眠雲松) : 안면도의 구름같은 소나무 숲

2. 오수조하 (烏峀朝霞) : 오서산의 아침노을

3. 용금망월 (湧金望月) : 용금문 (서문)의 보름달

4. 한산석종 (寒山夕鐘) : 한산사의 석종

5. 연항누선 (沿港樓船) : 항구에 연의은 높은 배

6. 오연우죽 (娛烟雨竹) : 외연도의 빗살같은 대나무 숲

7. 오도만범 (鰲島晩帆) : 자라섬의 저녁 돛대

8. 해문호봉 (海門狐峰) : 바다목의 여우봉

9. 능허후조 (凌虛候潮) : 능허각의 조수물

10. 고소어화 (姑蘇漁火) : 고소대의 고기배 불빛